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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딱이

<진해군항제3>화려한 벚꽃으로 본 진해의 일본 흔적


아쉽게도 꽃샘추위에 꽃망울이 움츠러들었습니다. 다음 주말이면 활짝 필 것 같군요. 그래도 전국에서 몰려든 인파로 북적입니다. 말 그대로 '난리 벚꽃장'입니다.

28일 여좌천, 내수면연구소를 찾은 사람들. 철갑상어가 보이죠.


진해하면 떠오르는 게 벚꽃, 해군, 군항일 겁니다. 전국 최대로 꼽히는 화려한 진해 벚꽃 이면에는 근현대사의 아픔이 있습니다. 분홍 벚꽃에만 홀렸다 가지 말고 근현대사 흔적도 한번 보길 바랍니다.

진해군항제의 기원은 1952년 4월 13일 지금 북원로터리에 전국에서 처음으로 충무공 이순신 장군 동상을 세워 추모제를 지낸 데서 유래를 찾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올해로 군항제는 47회째를 맞고 있고 매년 이충무공호국정신선양회가 주관합니다. 민관군이 함께 군항제를 여는 거죠.

그렇다면, 해방 전에도 진해에 벚꽃이 있었을까, 벚꽃놀이를 했을까요. 진해는 일제의 해군기지가 있었던 곳입니다. 지금 행사가 벌어지는 중원로터리를 중심으로 한 시내 방사형 도로구조도 일제가 만든 신시가지였습니다. 꼭 세계로 뻗어나가는 욱일승천기같습니다. 이 신시가지는 일본인들이 살았습니다.

중원로터리를 중심으로 한 행사장 안내도입니다. 진해 방사형 도시구조는 일제의 흔적입니다. 욱일승천기와 꼭 닮았죠. 탑산에서 내려보시면 그형태를 잘 볼 수 있습니다.

중원로터리에는 예전에 분수가 있었는데 지금은 잔디 광장으로 바뀌었습니다. 그게 작년쯤일 겁니다. 왼쪽은 광장조성 조감도, 오른쪽은 조성 후 사진입니다. /사진 : 경남도민일보



아래 일본식 집들은 중원로터리를 중심으로 한 방사향 시가지에서 볼 수 있습니다.

맨 위쪽은 중원로터리 인근 데시앙아파트 맞은편 건물, 두번째는 시내 중국음식점 신생원 근처와 충무동주민센터 옆 건물, 세번째는 진해소방서 근처 건물인데 뒤에 탑산이 보입니다. 진해 일본의 흔적이 많습니다.


벚꽃이 일본 것이라는 논쟁이 있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제주도에 벚꽃 자생지가 발견되면서 논란은 사그라졌습니다만 일본의 흔적이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겠습니다. 진해 토박이인 장인어른은 해방 전에도 벚꽃나무가 있었고 일본사람들이 벚꽃놀이를 즐겼다고 합니다.

벚꽃은 '확 피었다가 확 떨어진다'고 해서 일본 사무라이 정신을 닮았다고 하죠. 우리나라도 옛날부터 꽃놀이를 했다지만 양반들이나 즐겼지 어디 먹고살기 어려운 민초들이 꿈에나 꾸었겠습니까.

일본의 벚꽃놀이 역사를 찾아보니 헤이안시대(794~1185년) 궁정에서 귀족놀이로 행해졌고 에도시대(1603~1867년)에 들어 서민들의 꽃놀이로 번졌다고 합니다. 일본사람들은 벚꽃나무 아래 돗자리를 깔고 먹고, 마시고, 가무를 즐긴다고 합니다. 화툿장 3이 벚꽃이죠. 삼광 그림에 휘장이 일본에서 경조사 때 천막에 건다는군요.

앞서 전편에도 잠깐 언급했지만 창원으로 넘어가는 안민(편안할 안, 백성 민)고개의 뜻은 묘합니다. 조선시대 때부터 진해가 점령 당하는 등 일본의 영향을 많이 받았던 점을 고려하면 아마 그 고개가 일본이 넘지 못한 선이 아닐까하는 생각도 듭니다.

진해의 내력과 연관된 역사를 보겠습니다.

1407년 - 태종8년 왜구와 타협, 웅천에 왜관설치
1419년 - 세종 1년 대마도 정벌, 왜관 폐쇄
1426년 - 삼포개항
1452년 - 완포현과 웅신현이 웅천현으로 개편
1597년 - 정유재란
1896년 - 경남도 웅천군이 됨
1904년 - 러일전쟁 발발
1905년 - 을사늑약
1912년 -웅중면 일부와 웅서면을 포함. 진해면(웅천, 웅동 제외)으로 개편
1931년 - 진해읍으로 승격
1955년 - 진해시로 승격
1973년 - 창원군 웅천면 편입
1983년 - 창원군 웅동면 편입

예로부터 우리나라 남해안에 왜구의 출몰이 잦았답니다. 조선시대에는 왜관을 설치하거나 개항을 해서 달래기도 하고 대마도 정벌같이 치기도 했습니다.

1426년에 개항한 삼포는 부산포(동래), 제포(웅천), 염포(울산)입니다. 제포가 지금의 웅천 제덕입니다. 중요한 대목은 임진왜란 때 일본이 '명나라 치러간다, 길을 열어라'며 상륙한 곳이 부산이었는데 정유재란 때는 웅천으로 상륙했다는 점입니다. 이를 두고 일본이 진해지역을 자기 땅이라고 여겼을 거라는 의견도 있습니다.

그 흔적이 안골왜성입니다. 천하의 요새로 삼은 셈입니다. 그리고 충무공이 안골포 진격 때 학인진을 폈다는 기록도, 배를 고쳤다는 안골포 굴강도 남아있습니다.

일본은 그들의 역사에서 진해가 중요했습니다. 러일전쟁 때 일본은 진해에 해군함대기지를 뒀습니다. 대마도와 진해를 잇는 전략적 요새를 구축해 동해로 출병, 해전사에 큰 기록을 남겼습니다. 러시아 발틱함대를 박살 내버렸죠. 그리고 을사늑약으로 진해는 그들의 땅이 됐습니다.

진해지역 시민사회단체들이 북원로터리 충무공 동상 앞에서 올해 군악의장페스티벌에 일본 자위대를 초청한 것을 반대하는 기자회견 장면. / 사진 : 경남도민일보


올해 군항제 기간에 진해세계군악의장페스티벌에 일본 자위대 동경 음악대가 초청된 데 대한 반발이 거셌습니다. 결국, 진해시가 이 계획을 취소하긴 했지만 과거에서 비롯된 현재의 정서입니다. 일본이 점령했던 진해, 그것도 그들이 심어 유래했던 벚꽃길을 행진하게 한다는 게 용납이 안 되는 거죠.

미군부대 앞에서 몸싸움하는 전경과 시위대(왼쪽), 미군부대 키리졸브 훈련 장면과 전쟁연습 반대 시민단체 기자회견. /사진 : 경남도민일보


근대사 흔적은 곳곳에 남아있습니다. 특히 일본의 흔적이 많습니다. 그중 하나가 벚꽃일 겁니다. 그리고 일본식 건축물도 많이 남아있습니다. 또 중원로터리 흰색 우체국 건물은 1912년에 지어진 러시아식입니다.

진해우체국, 1912년에 준공했으나 100년이 다 돼 갑니다. 군항제기간에 우표전시회를 합니다.


일제 강점기 일본 해군기지는 해방 이후 우리나라 해군본부(해군기지사령부, 지난 2007년 부산으로 옮겨간 해군작전사령부, 해군교육사령부)가 진해에 그대로 남았습니다. 일본이 빠진 자리에 미군이 있습니다. 지난 2005년에는 미핵잠수함이 진해 소모도기지에 정박한 것이 녹색연합에 들키기도 했습니다. 논란은 한반도 비핵화선언 위반, 핵폐기물 교체 등이었습니다.

반미, 통일운동을 하는 이들은 매년 미해군함대지원부대 앞에서 시위를 하기도 합니다. 이 부대는 북원로터리 충무공동상 뒤쪽으로 들어가면 있습니다. 한국경찰이 지켜주고 있습니다. 이 또한 현대사의 아픔입니다.

진해도서관 마당에 있는 시월유신 기념탑.


또 하나 현대사의 아픔, 그 흔적이 아직 남은 곳이 있습니다. 우체국 옆에 진해도서관이 있습니다. 도서관을 그냥 지나치지 마십시오. 마당에 있는 동상을 유심히 보시길 바랍니다. '시월유신 기념탑'이 있습니다. 박정희 정권의 장기집권체제 구축을 위한 유신헌법을 기념한답시고 만들어놓은 것입니다. 도서관이 여좌동 옛주택은행으로 옮길 때 이 탑은 어디로 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