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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딱이

폐지 줍는 노인, 그리고 대선

설날 밤길 걷다 속이 답답해진 장면

컴컴한 골목길을 걸었다. 설날 밤, 집으로 가는 길이었다. 30분 정도 걸으면 되는 길이라 부른 배도 꺼트리고 취기도 달래볼 참이었다.

몇 블록을 지났다. 집 앞에 부려놓은 폐지를 정리하는 할아버지가 보였다. '설날인데…'하면서 계속 걸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어둑한 골목에서 수레를 끌며 폐지를 줍는 할머니를 지나쳤다. '설날인데…'. 소화는커녕 속은 답답했다.

2013년 6월 노인 빈곤율 문제를 취재한 적이 있다. 신문사 아래로 보이는 재활용업체에는 출근도장 찍듯 폐지를 모아 팔러 오는 노인이 많았었다. 그 모습을 보면서 꼭 취재를 해봐야겠다 생각했었는데 문제는 출입처 일에 쫓기다 보니 쉽지 않았다. 그렇게 흘러가다 우리 부서에 배치된 대학생 인턴기자 2명이 힘을 보태면서 취재를 시작했다. 고물상에서 하루, 폐지 줍는 노인 따라다니기 하루. 그리고 통계와 실태, 전문가들 의견을 담아 '빈곤율 40%, 노년의 그늘'이라는 제목을 단 기사를 썼다.


2013년 6월 '빈곤율 40%, 노년의 그늘' 기획보도 당시 그래픽. 4년이 지났다. 더 캄캄해졌다.


4년이 지났다. 어떻게 바뀌었을까. 밤길 수레 끌며 폐지를 줍다 차에 치이는 끔찍한 사고소식은 끊이지 않는다. 폐지를 주워 생계를 꾸리는 모습이 골목마다 가득하다. 그때 취재했던 재활용업체에 전화를 걸어 폐지가격을 물었다. 종이류는 ㎏당 100~120원이다. 철(130~200원) 가격은 반토막 났다.

빈곤율은 더 치솟았다. 최근 통계청·한국은행·금융감독원이 발표한 '가계금융 복지조사' 결과를 보면 65세 이상 노인 빈곤율은 61.7%(2015년). 중위소득의 50% 미만인 인구 비율이 빈곤율이다. 2011년 통계 작성 이후 최고치라는데, 설날 속이 답답했던 골목길보다 더 캄캄하다. 종일 수레를 끌어 뒤에서 사람이 보이지 않을 만큼 모아도 벌이가 시원찮다. 하루 벌이 몇천 원이지만 그래도 길바닥으로 나설 수밖에 없는 현실은 무겁다. 자녀가 있어도 손 벌릴 수 없는 세상이다.

온 가족이, 세대가 고용불안에 떤다. '졸업=실업'인 청년들은 끝 모르게 오르는 실업률에 좌절한다. 자식들 뒷바라지해야 하는 중년들은 위태롭다. 정규직 일자리는 하늘 별 따기, 또 하나의 계급인 비정규직은 더 서럽다.

제대로 ‘갑’ 노릇 기회 놓치지 말아야

빈곤의 악순환. 길에서 마주치는 폐지 줍는 노인들의 모습은 우리의 미래 자화상일지도 모른다. 이대로 가다간 나도 폐지를 주우며 노후를 보내지 않을까. 그렇게 살고 싶지 않지만.

정초부터 불편한 이야기를 꺼내 죄송스럽지만 감출 수 없는 현실이다. 바꿔야 한다. 위정자들에게 우리가 제대로 '갑' 노릇 할 수 있는 시기를 놓칠 수 없다. 우리는 똑똑히 보고 있다. 권력을 잘못 맡겼다간 세상이, 내 삶이 어떻게 망가지는지.

대통령 선거는 시작됐다. 대선 판에서 누가 불안한 상황을 세대 간 갈등으로 부추겨 싸움을 붙이는지 잘 봐야 한다. 그리고 복지를 '미래 투자'가 아니라 '비용과 지출'로 몰아가는지 감시해야 한다. 재활용산업에 복무하며 생을 마감할 수 없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