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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딱이

23년만에 아들을 땅에 묻은 어머니


아들이 죽은 지 23년 만에 장례를 치르는 어머니의 마음은 어떨까. 마음이 너무 아프다. 칠순이 넘어 이제 팔순을 바라보는 어머니를 생각하면. 지난 23년 동안 죽은 아들의 사인을 밝히려고, 명예회복을 위해 버텨온 어머니는 아들을 묻었다.

지난 1987년 민주노조 운동을 하다 의문사한 창원 대우중공업(현 두산DST) 노동자 정경식(1959~1987년) 씨의 어머니 이야기다.

정경식 열사는 최근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에서 민주화 유공자로 인정됐다. 사인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조금이나마 명예를 회복한 것이다. 진상규명이 되지 않았지만 23년 만에 장례일정이 잡혔다.


민주노총은 8일 '노동해방 열사 정경식 동지 전국민주노동자 장'으로 장례식을 치렀다. 서울 민주노총 앞에서 영결식을 하고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동면 진동리 고향에서 노제와 동료 노동자들이 참석한 성산구 중앙공원에서 제를 지냈다. 그리고 정경식 열사의 유해는 일했던 공장을 거쳐 양산 솥발산 열사묘역에 묻혔다.


장례식이 하루 종일이었지만 길면 얼마나 길겠는가. 지난 23년을 버텨온 어머니도 있는데.

8년 전 어머니를 찾아갔던 적이 있다. 잊고 지냈다. 죄송스럽다.

2002년 여름 어머니의 이야기다.



"용서 할테니 이제 양심선언 해야제…!"?
의문사한 대우중 노동자 정경식 어머니의 한맺힌 15년
2002년 08월 21일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위원장 한상범)는 지난 87년 6월 노조지부장 선거과정에서 실종된 지 9개월 만에 이듬해 3월 2일 창원 불모산에서 유골로 발견된 대우중공업(주) 창원공장 노동자 정경식 씨가 현장에서 숨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지난 16일 발표했다.


지난 15년간 아들의 죽음의 진실을 밝히려고 온몸으로 싸워온 김을선(69) 씨를 20일 만났다. 어머니는 마산 진동면 진동시장에서 생선장사를 하며 생활비와 아들의 진상규명에 필요한 돈을 벌고 있다. 전날 5일장인 진동장 장사를 마치고 몸이 아파 집에서 쉬고 있던 어머니는 아들에 대한 지난 일들을 떠올리며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 말문을 열었다.

"경식이가 자살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 밝혀진 것만도 고맙지.", "이제는 용서할 테니 그 당시 관계자들이 양심선언을 해 진상규명이 이뤄져야 하제."

모정은 쓰라린 지난 15년 원한을 접은 채 말문을 열었다.

"이전에는 그때 아들의 죽음과 관련된 사람은 죽이고 싶은 마음까지 들었지만 이제는 좋은 맘을 먹어야 아들도 좋은데 간다는 믿음이 생겨났다."

정 씨의 의문사는 지난 87년 12월 천주산 관음사 인근에서 신원불명의 변시체가 발견되면서 6개월 전 실종된 정 씨의 시신이라는 주장이 제기돼 세상에 알려졌다. 그러나 경찰은 발견된 변시체를 가매장해 보여주지 않았고, 국과수 부검에도 따돌리는 등 의혹이 증폭되기 시작했다.

이런 과정에서 '정경식 실종사건 진상규명 대책위원회'가 88년 3월3일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주최로 '정 씨가 타살돼 암매장된 것이라는 의혹에 대한 기자회견'을 서울서 갖기로 했는데 회견 하루 전인 3월 2일 불모산에서 정 씨의 것으로 추정되는 유골이 발견됐다.

어머니는 등산로 옆에서 아들의 유골이 발견된 현장 상황에 대해 "부패한 냄새도 안 나고, 뼈가 높은 곳에도 올라가 있고, 누가 뼈를 옮겨 놓은 것이었다"며 부패한 흙의 상태를 알아보려고 생선을 마당에 한동안 묻어 놓고 파보기도 하고, 목을 맨 나무의 상태를 보기위해 마당의 나무에 끈을 묶어 놓기도 해보았다. 어머니는 진상규명이 되지 않고서는 장례식을 할 수 없다며 유골을 2년 여간 집에서 보관했다. 아침·저녁으로 살아있는 아들처럼 대하다 지금은 경기도 모란공원 납골당에 임시보관하고 있다.

87년 당시 선거과정에서 폭행사고 합의문제로 전화를 받고 나가고 나서 실종된 아들의 소식을 기다리며 밤잠도 벽에 기댄 채 전화기를 무릎에 올려놓고 자기도 했으나 앉아서 울고만 있을 수 없었다. 마산·창원시내 곳곳에 호소문을 박스 채 이고 다니며 벽에 붙이고, 시민들에게 돌리다 시민단체와 정당에까지 연결돼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또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에도 회원으로 활동하면서 전국적으로 정씨의 의문사에 대한 진상규명활동을 해왔다.
 
시골 장터 좌판에서 생선 팔던 한글도 모르는 무식쟁이 어머니는 아들 죽음의 진상을 밝히기 위해서는 강해져야만 했다. 어머니는 아들의 죽음이 민주노조 건설의 밑거름이 되고자 각종 집회에 참가했으며, 수 없이 잡혀가고, 폭행에, 수감 생활까지 했다.

의문사위의 동행명령 거부를 한 당시 담당검사에 대해 "당시 현장에 검사가 와서 제대로 조사도 않고 갔다"며 "국민을 위한 검사가 의혹 많은 죽음을 무심하게 자살로 처리한 것에 대한 양심을 묻고 싶다"고 토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