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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향

안내판 읽다 숨넘어가겠네.


문장을 흔히 길이에 따라 '간결-만연체'로 나눕니다. 학교 다닐때 국어시간에 많이 들었던 단어입니다. 갑자기 왜 재미없는 단어를 꺼내느냐구요?


등산길에 샘터를 소개한 안내판 글을 읽다가 숨너어갈 뻔했기 때문입니다. 이 글을 누가 썼을까? 하면서 숨을 돌리긴 했지만 그 샘터를 지날때마다 궁금했습니다. 일단 안내판을 한 번 보시죠. '옛날 옛적에'로 시작하는 첫문장에서 '바랍니다'로 끝나는 9줄의 안내문 한 문장입니다. 중간 중간 쉼표가 있습니다만 이렇게 긴 문장은 처음 봤습니다.

진해 석동사무소나 대우푸르지오 뒷길을 따라 등산로를 오르면 돌리 통새미 앞에 선 이 안내판을 만날 수 있습니다.


어떻습니까. 정말 길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글을 쓴 사람을 찾아나섰습니다. 다음은 그 주인공의 이야기입니다.

진해 돌리 통새미 가꾼 박용대 씨  

'강철 같은 의지와 열정'으로 등산로와 샘을 가꿔 돌보는 사람을 수소문했다. 진해 석동사무소에서 천자봉 임도로 올라가는 산길에 있는 '돌리 통새미'를 소개한 안내판의 주인공이다.

'돌리'는 돌이 많다는 석동의 옛 이름이고 '통새미'는 예로부터 내려오던 이름이다. 안내판에 적힌 대로 통새미는 '장복산의 수려한 배경과 호수같이 잔잔한 진해만 바다 위에 한 폭의 그림처럼 점점이 떠있는 낭만 어린 섬들을 전망'할 수 있는 곳에 있다.

또한, '나다니엘 호손의 큰바위 얼굴 같은 웅장하고 아름다운 바위' 닮은 생김새에 그 아래에서 샘물이 흐른다. 전설 한 소절, '특급약수가 끊임없이 흘러나와 웅천 현감이 가마 타고 창원을 거쳐 한양으로 가던 도중에 쉬면서 약수로 목을 축'였단다.

가시덤불, 칡넝쿨에 가려진 통새미를 개발하고 등산로를 닦아 꽃과 나무를 심어 '쉼터'로 가꿨다는 그를 만나고 싶었다. 안내판이 처음 세워진 때가 1999년, 자주 이곳을 찾는 이들은 매일 새벽에 통새미를 돌보는 이가 있다고 했다.

10년 동안 진해 돌리 통새미를 가꿔 온 이야기를 하는 박용대 씨.


아직 어둑어둑한 새벽에 산길을 올라 그를 만났다. 10년 전 석동사무소 동장이었던 박용대(66) 씨가 그 열정의 주인공. 오랫동안 도청에서 일하다 진해로 옮겨 도서관장 2년하고 석동 동장을 맡았었다. 당시 주민들이 등산로에 물이 질퍽거려 옷이 젖는다고 해 등산로를 올랐던 게 지금까지 매일 오르게 된 계기다.

처음엔 '도깨비 소굴'이었다. 길도 마주 오는 사람 겨우 비켜갈 정도로 좁았고 얽히고설킨 칡, 대나무 캐내느라 고생했단다. 그렇다고 그가 가꾼 길이 신작로 내듯 확 밀어 산을 훼손한 것은 아니다.

삽질 곡괭이질은 예사고 나무를 직접 메고 올라와 심었다. 새벽같이 산에 올라 돌 치우고 쌓기, 쓰레기 줍기, 나무심기 같은 통새미 정비하는 것으로 하루일과를 시작한 지 10년째다. 서울 형님네 부모님 제사지내러 가는 날만 빼고 1년 내내 통새미에 출근도장을 찍는단다. 운동도 열심히 한다. 하루 평행봉 120개는 기본이다.

그는 통새미 물이 가재가 살 정도로 좋다고 자랑한다. 그러나 올해는 가뭄 탓에 샘이 말랐으니 안타깝다. 올해처럼 물이 안 나오기는 10년 동안 처음이란다.

이야기를 주고받는 사이 날은 밝아오고 오가는 사람들 발길도 잦아진다. 그에게 인사를 하던 아주머니는 "얼마나 부지런하신지, 너무 감사하다. 끝내줘요"라고 했다. 그는 부끄러워 어쩔 줄을 모른다.

동장으로 있으면서 통새미 가꾸고 공직생활 잘 마무리한 게 가장 보람이란다. 그는 보기 드물게 석동 동장을 4년이나 했다. 주민들이 부지런한 동장을 보내주지 않아서다.

그 보람은 계속 커진다. "꽃피고 얼마나 좋아예." 새벽녘에 올라와 청소하고 운동하고 바다가 보이는 탁 트인 앞을 내다보면 뿌듯하다. 10년 전 심었던 벚나무가 이제 두 손아귀로 감싸지 못할 정도다. 그의 손을 거친 나무만 해도 감나무, 밤나무, 매실나무, 복숭아, 향나무, 종려나무, 주목, 동백, 산수유, 편백, 고로쇠, 진달래 갖가지다.
 
진해시에서도 차나무를 심고 정자를 만들어 쉼터 가꾸기에 힘을 보태고 있다. 안내판 글귀는 자신이 쓴 거라고 했다. 세상에 스스로 '강철 같은 의지와 열정'을 가진 인간이라고 믿는 이가 얼마나 될까. 그 열정이 느껴진다.

그는 헤어지며 말했다.
"신문에 내고 하면 안 됩니다."

그러나 그럴 수 없다.
그의 열정을 소문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