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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향

"언론은 제 입맛에 맞는 것만 골라쓴다"


제대로 상대방의 말을 받아 적고 있는지 이렇게 신경을 곤두세운 건 처음이다. 의회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를 기록으로, 역사로 남기는 속기사 앞에 앉았기 때문이다.

앞에 앉은 속기사가 취재수첩에 써내려가는 글자를 꿰뚫는 것 같아 조심스럽다. 혹, 보고 있었느냐고 물으니 "아까부터 계속 보고 있었어요"라고 한다.

경남도의회에서 일하는 이혜경(42 사진 오른쪽)·이기옥(40) 씨는 19년차 속기사. 속기사라 하면 1분당 320자를 옮겨 적어야 하는 전문직이다. 이들은 지난 1991년 지방의회가 부활했을 때부터 도의회를 지켰으니 지방자치의 '산증인'이라고 해도 부족함이 없다.

그들 눈에는 지난 18년 동안 도의회가 어떻게 바뀌었을까. 도의원들이 많이 젊어지고, 사회가 다양해지면서 그에 따라 전문화, 몇몇 의원의 적극적인 의정활동으로 전체가 동화되어가는 게 눈에 보인다고 했다. 아쉬운 점으로는 당적에 묶여 자기 의지를 밝히지 못하는 것 같다고 했다.

초기에는 2명으로 시작했는데 예산결산특별위원회가 새벽 4시까지 이어진 날, 둘이서 자다가 깼다 교대하며 속기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경남 속기사 1호'인 혜경 씨는 "속기사가 의회 꽃이라 했는데 꽃도 시듭니다"라고 했다. 지나온 18년에 대한 마른 감정이다. 지금은 조금 후회도 된단다. "그렇게 열심히 했으면 다른 걸 선택했더라도 아주 할 수 있었을 겁니다." 속기사 시험은 연습장을 사람 키까지 쌓아야 붙는다고 할 정도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고 어렵다. 기옥 씨도 "그때는 국회 속기사로 알고 시험을 쳤어요"라고 했다.

이들이 그렇게 말하는 데는 이유는 처우문제다. 국회는 속기직렬 공무원이지만 지방의회 속기사는 기능직이기 때문이다.

도의회 속기사 10명은 본회의, 특별위원회, 상임위원회별로 배속을 받아 둘이서 한 조로 50분씩 교대하며 일한다. 도의회 1년 중 회기 일수는 140일, 그렇다면 나머지는 일이 없을까. 혜경 씨는 "50분 끝나면 땡인 줄 아는 데 절대로 그렇지 않아요"라고 했다. 속기는 받아 적는 게 끝이 아니다. 편집과 교정에 두 배 이상의 시간을 쏟아야 한다. 이 같은 작업이 비회기 기간에 진행된다. 기옥 씨는 "30일 이내 회의록을 발간해야 하는데 그 기간이 끝나기 전에 다음 회기가 돌아와요. 정신없어요"라고 전했다.

자신이 속기한 내용과 언론보도가 다를 때는 '자기 생각대로 필요한 부분을 골라 쓴다'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사투리 심한 의원들은 경계대상이다. 그렇다고 비속어를 그대로 옮길 수 없을 때는 분위기와 의미전달이 뒤틀리지 않게 풀어 옮긴다.

속기사가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이유다. 기옥 씨는 "속기는 전문화된 기술인데 교정은 의미전달이 중요하니 감각이 있어야 해요"라며 "다른 사람들이 속기업무를 기능적으로 만 보는 것 같아 안타까워요"라고 말했다.

말과 글을 만지는 일이라 직업병도 있다. 신문을 보면 오탈자부터 쏙쏙 눈에 들어오고 다른 사람 말을 들어도 잘못된 말버릇부터 들린단다. 신체적인 부하도 느낀다. 잘 들어야 하고 잘 기록해야 하니 귀와 손 관리를 잘해야겠다고 하니 허리와 어깨도 중요하다고 했다. 계속된 반복작업으로 생기는 근골격계 질환을 말하는 데 아직 직업병으로 인정을 받은 사례는 없단다.

그래도 속기사로서 느끼는 보람은 의원들의 의정활동이 빛이 날 때다. 또한, 민감한 문제나 법적인 문제가 걸렸을 때 회의록이 증거자료가 됐을 때다.